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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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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양은 808년에 태어나 신라 하대(下代)의 인물로, 839년 신무왕 추대에 기여한 인물이다. 흥덕왕, 희강왕 시기에 고성군태수, 중원경 대윤, 무진주 도독 등을 역임하며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흥덕왕 사후 김균정 편에 가담하여 왕위 쟁탈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여 청해진으로 피신, 김우징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무진주를 점령하고 왕경으로 진격, 민애왕을 살해하고 신무왕 즉위에 기여했다. 신무왕 사후 문성왕 대에 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으며, 당나라에서 벼슬을 받기도 했다. 사후 서발한으로 추증되었고, 묘는 경주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다. 김양은 《삼국사기》에서 칭송받았으며, 《동국통감》에서는 명백정대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동사강목》에서는 장보고를 외면한 점이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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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 (신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김양
원어 이름金陽
작위신라시중
재위 기간847년~848년
군주신라 문성왕
군주 칭호국왕
양(陽)
위흔(魏昕)
출생808년
사망857년 8월 13일(50세)
성별남성
가문 정보
왕조신라
가문김씨
아버지김정여
서훈서발한 추증
계급평동장군

2. 생애

808년에 김주원의 후손인 김정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822년, 그의 외삼촌인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김양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2] 흥덕왕 3년(828년)에 고성군태수가 되었고, 중원대윤을 거쳐 무진주도독 등을 지냈다.[6]

836년 흥덕왕이 죽고 김균정김제륭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김양은 김균정 편에 가담하였다.[3] 김균정의 매서인 예징(禮徵)과 함께 자신의 사병(족병)을 데리고 적판궁(積板宮)을 지켰으나, 김명과 이홍 등이 이끄는 김제륭측 군사들에게 패배하였다. 김균정은 이홍에게 살해되었고, 김양은 다리에 화살을 맞고 산속으로 피신하였다.[6]

이듬해(837년)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청해진에서 장보고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838년 2월 청해진으로 가서 김우징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6] 김우징과 김양은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장보고는 이를 수락하여 그의 친구 정년도 김우징을 따르게 했다.[3] 3월에 5천의 군사로 거병해 무진주를 점령하고, 남원에서 승리하였으나 김우징의 명령으로 청해진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며 왕경을 향해 출진하였다.[6]

839년 김우징, 김양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달벌구 전투에서 민애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빠르게 수도로 진격했다.[3] 무진주의 철야현(鐵冶縣) 북쪽 강에서 민애왕이 보낸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의 역습을 받았지만,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 이들을 궤멸시켰다. 정월 19일에는 달벌구에서 민애왕이 친히 지휘하던 왕군(王軍)을 격파하였다. 민애왕은 월유택(月遊宅)으로 달아났으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고, 김이홍 또한 살해되었다.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즉위하였다.[3][6]

4월에 김우징은 김양 등의 추대로 왕으로 즉위하였으나(신무왕) 석 달만에 죽고 대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하였다.[6] 문성왕이 즉위한 뒤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받았다가 곧 시중 겸 병부령으로 옮겨졌다.[6]

생전에 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이 제수되기도 했다.[6] 죽은 후 문성왕에 의해 서발한(舒發翰)이 추증되고, 부의(賻儀)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의 구례(舊禮)에 따르게 하는 등 신라 조정은 그에게 특전을 베풀었다. 12월 8일에 태종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흥덕왕 3년(828년)에 고성군태수가 되었고, 중원대윤을 거쳐 무진주도독 등을 지냈다.[6]

흥덕왕이 죽고, 균정제륭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균정 편에 가담하여 자신의 족병을 데리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지켰다. 제륭파의 김명·이홍 등이 와서 적판궁을 에워싸자 활을 쏘며 저항했으나 다리에 화살을 맞아 달아나고, 균정이 이홍에게 살해된 뒤 산속에 피신하였다.[6]

그 이듬해(837년)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청해진에서 장보고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아 민애왕 원년(838년) 2월에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과 함께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6] 3월에 5천의 군사로 거병해 무진주를 점령하고, 나아가 남원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김우징의 명령으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한 뒤,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며 왕경을 향해 출진하였다.[6]

왕경(王京)을 향해 출병한 군사들은 무진주의 철야현(鐵冶縣) 북쪽 강에서 민애왕이 보낸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의 역습을 받았으나,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 이들을 궤멸시켰다.[6] 이듬해인 민애왕 2년(839년) 정월 19일에는 달벌구에서 민애왕이 친히 지휘하던 왕군(王軍)을 격파하였다.[6] 이궁이었던 월유택(月遊宅)으로 달아난 왕은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고 거병은 김우징측의 승리로 끝났다.[6] 4월에 김우징은 김양 등의 추대로 왕으로 즉위하였으나(신무왕) 석 달만에 죽고 대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하였다.[6] 문성왕이 즉위한 뒤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받았다가 곧 시중 겸 병부령으로 옮겨졌다.[6]

생전에 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이 제수되기도 했다.[6]

2. 2. 왕위 쟁탈전과 신무왕 옹립

836년 흥덕왕이 죽고 김균정김제륭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김양은 김균정 편에 가담하였다.[3] 김균정의 매서인 예징(禮徵)과 함께 자신의 사병(족병)을 데리고 적판궁(積板宮)을 지켰으나, 김명과 이홍 등이 이끄는 김제륭측 군사들에게 패배하였다. 김균정은 이홍에게 살해되었고, 김양은 다리에 화살을 맞고 산속으로 피신하였다.[6]

이듬해(837년)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청해진에서 장보고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838년 2월 청해진으로 가서 김우징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6] 김우징과 김양은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장보고는 이를 수락하여 그의 친구 정년도 김우징을 따르게 했다.[3] 3월에 5천의 군사로 거병해 무진주를 점령하고, 남원에서 승리하였으나 김우징의 명령으로 청해진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며 왕경을 향해 출진하였다.[6]

839년 김우징, 김양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달벌구 전투에서 민애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빠르게 수도로 진격했다.[3] 무진주의 철야현(鐵冶縣) 북쪽 강에서 민애왕이 보낸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의 역습을 받았지만,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 이들을 궤멸시켰다. 정월 19일에는 달벌구에서 민애왕이 친히 지휘하던 왕군(王軍)을 격파하였다. 민애왕은 월유택(月遊宅)으로 달아났으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고, 김이홍 또한 살해되었다.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즉위하였다.[3][6]

2. 3. 사후

3. 묘소

김양의 묘는 지금의 경주시 서악동 1006-1번지의 태종무열왕릉 앞쪽 약 15m 지점에 있는 둘레 약 60m 되는 원형봉토분으로 비정되고 있다. 무덤 면적은 7,867m2이며 특별한 장식은 없다.[5] 1982년 8월 4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4. 평가

《삼국사기》에는 김양의 지방관으로서의 행적에 대해 "가는 곳마다 칭송하는 소리가 많았다"고 읊었으며, 직접 출병한 민애왕의 왕군(王軍)을 격파한 뒤 김양 자신은 기병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돌면서 "본래는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이고 지금 그 괴수가 죽었으니 귀족 남녀와 백성들은 마땅히 각각 편안히 거처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하고 외치고 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고, 앞서 적판궁에서 자신에게 활을 쏘아 넓적다리를 맞춘 희강왕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에 대해서도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을 향해 짖는 법인데 너는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내 더는 묻지 않겠으니,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등 사적인 보복을 금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보는 《동국통감》의 사론에서 "신라의 인물로서 영웅 호걸은 김유신만한 이가 없고, 명백정대(明白正大)하기로는 김양만한 이가 없다."는 평가를 남겼다. 그러나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죽을 때 국상(國相)을 맡고 있던 김양이 장보고를 위해 한 마디 변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며 "자신과 세력과 명성이 대등했던 그를 꺼려서가 아니었겠는가?"라 비난하고 있다. 김양은 단순한 도성내의 정변이 아닌 지방을 거점으로 한 장기간의 군사 행동으로 중앙 정권을 쓰러뜨렸다는 점, 성수(星宿)의 이변(異變)에 불과한 것을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시행하려는 징조'라 하여 민심을 이용했다는 점, 왕군 격파 후에 보복 금지로 민심 안정을 꾀했다는 점 등이 주목할 만하다.

4. 1. 비판적 시각

최보는 《동국통감》의 사론에서 "신라의 인물로서 영웅 호걸은 김유신만한 이가 없고, 명백정대(明白正大)하기로는 김양만한 이가 없다."는 평가를 남겼다. 그러나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죽을 때 국상(國相)을 맡고 있던 김양이 장보고를 위해 한 마디 변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며 "자신과 세력과 명성이 대등했던 그를 꺼려서가 아니었겠는가?"라 비난하고 있다. 김양은 단순한 도성내의 정변이 아닌 지방을 거점으로 한 장기간의 군사 행동으로 중앙 정권을 쓰러뜨렸다는 점, 성수(星宿)의 이변(異變)에 불과한 것을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시행하려는 징조'라 하여 민심을 이용했다는 점, 왕군 격파 후에 보복 금지로 민심 안정을 꾀했다는 점 등이 주목할 만하다.

5. 가계

고조부는 김무월이며, 증조부는 김주원이다.[2] 조부는 여러 관직을 지내고 집사성(執事省) 시중(侍中)을 지낸 김종기이다. 아버지 김정여이다.[2] 작은할아버지로 김헌창이 있고, 당숙으로는 김범문이 있다.

6. 등장 매체


  • KBS의 드라마 《해신》에서 배우 배수빈이 김양을 연기하였다.

참조

[1]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2] 웹사이트 김양 (金陽)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4-03
[3]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4] 논문 Slavery in Silla and its Sociological and Economic Implications Center for Korean Studies 1974
[5] 문서 김양 (808년)
[6] 문서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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